링거액이 세 방울 떨어지면,
그가 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문틀 너머였다. 어둠 속에서 조명 빛을 받고 있는 아버지를 지켜보면 어머니는 방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면서, 닮아가는 것을 걱정하셨다. 야쿠자 조직의 조장인 아버지를 어머니는 꽤 원망하셨다. 대책 없이 지르는 성격이라며, 그로 인해 고생을 자주 하셨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좋아하셨다. 사랑하는 것들에겐 지극정성이라며, 그런 부분은 마음에 든다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장점과 단점을 가진 나를 걱정하셨다. 머리는 나를 닮아서 좋은데 말이야, 너무 거침 없이 군단 말이야. 한 번은 어린 내가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찾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3시간을 지하철을 타고 나간 적이 있다. 돌아가는 길을 몰라 이름 모를 동네의 파출소에 직접 들어가 보호자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왜 계속 간 것이냐 물었을 때, 나는 뭐든 나오겠지 싶어서 갔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이후로 어머니는 나에게 모를 때는 얌전히 기다려서 답이 나올 때까지 생각하라 하셨고, 뒤늦게 소동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남자답다며 머리를 쓰담아주셨다. 드물게 웃는 아버지를 보며 나 또한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어머니도 닮았으니까.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좋아했다.
비가 내리는 나의 생일날, 가족들이 모인 마지막 식사 자리, 가족들이 사라진 날.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를.
그것은 사고이자 사건이었다. 생일에는 꼭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하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인 저녁이었다. 생일자인 나의 취향에 맞춰 후식이 맛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동생이 자신의 푸딩을 양보해줬고, 나는 동생에게 푸딩을 직접 떠서 먹여주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조금 남기고 우유 한 잔을 마셨고, 아버지는 뒷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뱃속의 아이에게 영향이 간다며 담배를 꺼내지 말라고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장난감을 사기로 했다. 동생이 자신도 고르게 해달라면서 떼를 쓰는 것을 말리다가 작은 몸싸움으로 번졌다. 조수석에 앉은 어머니가 그러다간 아무것도 못 사준다며 말리셨고, 아버지가 웃으며 자동차 페달을 밟았고.
섬광이 번쩍였다.
덤프트럭이 우리가 탄 승용차를 덮쳤다. 운전석 쪽으로 들이받았고, 내 위에는 동생이 있었고, 나는 운전석에서 가장 멀었다. 동생과 나는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동생은 얼마가지 못했던 듯 했다. 나는 수술을 받았다. 전해듣기로는 수술만 꼬박 이틀 가까이 걸렸다고 했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 남자.
닛코 이치몬지.
나 홀로 누워있는 1인 병실에 하얀 가운이 아닌 하얀 자켓을 입고 나타난 남자. 의사 같은 안경을 써놓고 두꺼운 팔뚝으로 문을 연 남자. 의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남자. 의사에게 정중하게 인사해놓고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
닛코의 등 뒤로 비슷한 키의 남자가 들어왔다. 밝은 머리색에 어두운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자신을 산쵸모라 소개했다. 응접실에서 몰래 훔쳐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면회까지 오래 걸렸어. 눈을 떠서 다행이구나. 더 다치지 않은 건 천운이야. “나는 너의 아버지와 친우였지.” 아버지께서, 가족들이 그렇게 된 것은 진심으로 안타깝구나.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리를 긁으려니 두툼한 거즈가 만져졌다. 머리카락은 짧게 밀려있었다. “수술 흉터가 남았어. 남자에게 흉터는 훈장이라니까, 너무 신경쓰진 마렴.” 나도 흉터가 있어, 보여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산쵸모는 상냥하게 웃으며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닛코는 무엇을 경계하는지 살짝 뒤로 물러났다. 산쵸모는 나의 인적 사항을 읊었다. 이름, 나이, 가족, 사는 곳. 맞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니? 야쿠자이고, 조장이었지. 너의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야. 그만큼 너의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지. 아직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감정을 가진단다. 그리고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지르기도 해. 나는 너의 아버지를 미워한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이 사고를 냈다고 생각해. 만약 아니어도, 지금의 너는 그 누군가에게 눈엣가시야. 신경쓰인다는 뜻이지. 왜냐하면,” 너는 그의 아들이니까.
산쵸모가 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선글라스 너머로 곱게 접히는 눈이 보였다. 울지도 않고 장하구나.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를 돕고 싶어. 너의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도 돕고 싶고. 네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러니까 어엿한 어른이 될 때까지는 많은 것을 지원해주고 싶어.” 나는 너의 아버지의 친우니까. 산쵸모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닛코는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였고, 산쵸모를 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당장은 결정하기 힘들 수도 있어, 내일 다시 오마. 산쵸모와 닛코가 병실을 나갔다. 나는 그대로 누웠다. 링거에서 또옥 또옥하는 소리가 났다.
다음 날, 회진이 끝나자마자 산쵸모가 병실로 들어왔다. 닛코와 또 다른 남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의 남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자신은 나를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조금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치몬지의 도움을 받으세요. 이쪽은 아직 어수선합니다. 제가 정리해두고 있을 테니 걱정마세요, 도련님.” 나와 눈이 마주친 산쵸모는 “닛코.” 하고 얇은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다. 종이는 남자에게 전해졌고, 남자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 성립이군. 산쵸모가 웃었다.
이후로는 닛코만 날마다 병실에 들렸다. 오늘 상태는 어떻지.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면 언어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하고선 의자에 앉았다. 수첩와 펜을 꺼낸 닛코는 간단한 질문을 시작했다. 쌀밥이 좋나, 면이 좋나. 빵은 간식이다. 매운 건 잘 먹나? 저 방송은 꼭 봐야 하는 건가? 저… 춤추고 노래하는 것들. 책도 많이 읽도록. 오늘 산책은 할 수 있나? 햇빛이 좋으니 웬만하면 해라. 날마다 조금씩 나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과 이름, 그가 문짝만하다는 것밖에 몰랐다. 닛코가 할 말은 없는가? 하고 물으면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러면 닛코도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휠체어가 아닌 내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됐을 때 즈음, 머리카락도 제법 길었을 때 즈음, 퇴원 수속이 이루어졌다. 산쵸모와 닛코가 찾아왔다. 하나 같이 하얀 자켓이나 코트를 입었는데, 신기하게도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닛코는 나를 슬쩍 보고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산쵸모는 내 몸통만한 꽃다발을 들고 왔다. 하얀 꽃이 종류 별로 꽂혀있고, 사이에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산쵸모는 의자에 앉았다. 퇴원 축하한다. 꽃다발을 받고 별다른 반응도 못하고 있으니, 산쵸모가 닛코를 불렀다. 닛코는 들고 왔던 종이봉투를 산쵸모에게 건넸다. 종이봉투를 부스럭거리며 산쵸모가 옷을 꺼냈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검은 와이셔츠와 하얀 바지였다. 원래 입고 있었던 옷은… 너무 더러워져서 새로 옷을 준비했단다. 마음에 들면 좋겠구나.
“앞으론 우리 집에서 살게 될 거다. 가면 다른 사람들도 있어, 심심하진 않을 거야. 네 방은 이미 준비해뒀단다. 너를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니까.” 그리고. 산쵸모가 곁눈질하자 닛코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와 산쵸모의 옆에 섰다. 산쵸모가 닛코의 허리께를 두드리며 말했다. “닛코가 옆에서 보살피는 것에는 능숙하거든. 닛코를 붙여줄 테니 필요한 건 닛코에게 편히 말하도록 해.” 산쵸모는 상냥하게 웃고 있었고, 닛코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감정 없는 눈.
닛코는 정중하게 하얀색 차의 문을 열어주면서도 나에게 굳이 눈길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붉은색 가죽으로 덮인 좌석에 산쵸모와 나란히 앉았다. 산쵸모는 살짝만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봤다.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그 또한 감정은 없어 보였다. 마주보기도 뭣해서 앞만 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닛코의 옆모습이 보였다. 하얀 자켓 위로 그림자가 짙게 깔려 검은색처럼 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한참을 도로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하얀 담장이 높이 쌓인 대문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저절로 굳게 닫힌 철장이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철장 옆에 서있는 남자 둘이 보였다.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는 남자들은 차가 한참을 앞질러 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차가 천천히 마당을 기었다. 큰 가위를 들고 소나무를 다듬던 중년의 남자가 차를 보곤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보지 못한 듯했다. “이곳엔 두 가지 사람이 있어.” 등 뒤에서 산쵸모가 말했다. “하나는 일 때문에 이곳에 온 사람, 또 하나는 ‘가족’.” 선글라스 너머의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너는 가족이란다.
커다란 전통 일본식 주택. 우리는 멘션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집은 티비에서만 봤다. 엘레베이터가 없고 마당이 있는 집은 처음이었다. 다듬어진 잔디를 밟으며 시바이누 정도 키우면 적당하겠다 생각하는데 저멀리서 개가 달려왔다. 시바이누는 아니고, 보다 다리가 길고 털이 짧고 새까만 개. 위로 솟은 귀는 뿔 같아서 꼭 오니처럼 보였다. 빠짝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산쵸모가 살짝 나의 앞에 섰다. 무서운 얼굴로 달려오던 개는 산쵸모의 손에 머리를 부비며 꼬리를 흔들었다. 경비견이야, 인사해볼래? 산쵸모가 개를 향해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해서 살짝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개는 커다란 코로 내 손부터 팔로 올라가며 냄새를 맡았다. 개의 입이 내 얼굴까지 오기 전에 산쵸모가 개를 밀어냈다. 아직은 홀로 나오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개가 꼿꼿이 꼬리를 세우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차가 끝난 것인지 닛코가 달려왔다. 왼날개, 코토리에게 안내를. 닛코가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닛코의 등이 돌아서 나를 향했다. 산쵸모가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렸다. 가보렴. 코토리는 나를 칭하는 거였나. 닛코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살짝 뒤를 돌아봤다. 산쵸모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저택은 컸지만 조용했다. 마루를 밟으면 끼익 소리가 났다. 성큼 걷는 닛코의 앞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빼꼼 튀어나온 얼굴들이 보였다. 아마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겠지. 몇몇은 작게 손을 흔들어주길래 나도 손을 흔들어줬다. 닛코의 설명은 단순했다. 어떤 방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는 들어가면 안 되는지, 어디에는 들어가도 되는지. 복도를 두 번 꺾어서 끝이 내 방이었다. 다다미가 깔린 방에는 낮은 책상과 병원에서 보던 침대만 놓여있었다. 곧 저녁 식사니 쉬고 있으라는 말을 끝으로 닛코가 방에서 나갔다. 드디어 병원 침대를 벗어나나 싶었는데 또다시 마주치니 기분이 썩 기쁘진 않았다. 다다미에 대자로 벌렁 누웠다. 처음 느껴보는 다다미의 감촉이 신기했다. 집에선 바로 누우면 어머니에게 한소리 들었다. 집에는 벽에 가족사진이 걸려있었고, 집에는 마당이 없고, 집에는…
깜빡 잠들었다. 닛코가 깨웠지만 도로 눈꺼풀이 닫히는 바람에 한참 눈을 부볐다. 내 팔을 잡고 이끌던 닛코가 한숨을 쉬더니 방향을 틀어 화장실로 데려갔다. 약간 높은 세면대에 내 복부를 한 쪽 팔로 안아들어 다른 쪽 손으로 물을 묻혔다. 약간 거친 세안에 코에 물이 들어가서 한참 콜록거렸다. 기침이 잦아들자 이번엔 부드러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처음으로 닛코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얼굴에 걸쳐진 안경에 물방울이 튀었다. 보라색인지 푸른색인지 오묘하게 빛나는 눈동자. 살짝 찌푸린 눈썹. 닛코의 커다란 손이 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물이 묻은 건지 고정된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고개를 털었다. 닛코의 안경에 물방울이 더 튀었다. 닛코가 안경을 벗어 수건으로 안경알을 문질렀다. 말없이 안경을 고쳐 쓰는 모습이 화가 난 것 같아서 긴장하고 있으니 닛코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강아지 같군. 그리고 수건으로 내 앞머리를 털어줬다.
“아이라더니 별로 귀엽지도 않잖아.”
은색의 머리를 가볍게 묶은 남자가 말했다. 기껏 와줬더니, 괜히 왔어.
“너무 그러지 마라, 히메츠루.”
금발의 곱슬거리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가족끼리 얼굴은 봐야지. 홀로 기모노를 입어서 그런지 할아버지 같았다.
“진짜 이 녀석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겁니까? 이런 애송이를?”
이중에선 가장 젊어보이는 금발의 남자가 말했다.
“오카시라의 결정이다. 다 뜻이 있으니 잠자코 있어라, 도라네코.”
닛코가 남자를 나무랐다. 미리 고지한대로 앞으로 함께 살게 될…
“코토리의 이름은 새로 지을까.” 손을 가볍게 들어 닛코의 말을 막은 산쵸모가 말했다. 신변 보호가 필요해서 말이지. 쓰던 이름을 쓰는 건 위험할 것 같아.
커다란 다다미방에 나를 포함한 여섯 명만 있었다. 산쵸모의 옆에 내가 앉고, 좌우로 나머지들이 앉았다. 각자의 앞엔 자기 몫의 저녁 식사가 작은 상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아 나도 젓가락을 집지 않았다. 회는 잘 못 먹는데, 국은 장국인가? 계란말이 먹고 싶다. 산쵸모의 상을 슬쩍 보았다. 소세지는 내 상에만 있었다. 특식이군.
“좋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기들끼리 대화가 끝난 것인지 산쵸모가 잔을 들었다. “그러면 코토리의 이름은 ‘부키츠’다. 앞으로는 부키츠로 부르고, 잘 부탁한다.”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산쵸모가 말했다. 나머지들도 내가 아닌 산쵸모를 보고 있었다. 단 한 명, 닛코를 제외하고. 닛코는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잔을 살짝 들어올렸다. 나도 따라서 잔을 들자 그제야 잔을 높게 들었다. “그러면, 가족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 여섯 명의 잔이 높이 들려 찰랑였다.
‘부키츠’로서의 삶은 익숙치 않은 것이 많았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 먹은 상을 치워주는 사람이 있었고, 씻겨주려는 사람도 있었다. 로션은 어떤게 좋으세요? 당황해서 답을 못하고 있으니 닛코가 그만두라고 했다. 그렇게 애 취급을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서 물에는 못 들어가.” 그러면 물수건을 준비하겠습니다. 닛코가 양치는 스스로 할 수 있냐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있을 때도 물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하가 붙여준 사람이 간병을 해줬는데, 내가 약에 취해있을 때 알아서 씻겨줬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맨정신으로 보살핌을 받는 건 처음이라는 뜻이다. 닛코를 따라 내 방으로 돌아가니 침대가 처음과 달리 두꺼운 수건이 깔려 있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여자 하나가 물이 담긴 깊은 그릇과 수건을 들고 왔다. 자, 누우세요. 잠자코 누웠더니 셔츠의 단추를 풀으려고 하길래 놀라서 손을 쳐냈다. 당황한 얼굴의 여자를 마주보면서 뒤로 물러났다. 부끄러우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여자가 웃긴 했지만 곤란해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남자다…
“내가 할 테니 물러가도록.” 닛코가 셔츠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거즈도 갈아야 할 텐데요. 그정도는 할 수 있어. 가 봐라. 여자가 끄덕이더니 뒷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닛코가 한숨을 쉬었다. 손이 많이 가는 도련님이군.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옷은 스스로 벗어라. 뒤를 돌고 있어서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더 심기를 건들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셔츠 단추를 조금 풀다가 그냥 뒤집어 벗었다. 하의를 고민하고 있으니 밑에도 벗고 덮으라며 닛코가 조금 큰 수건을 건네주었다.
엎드리면 이불과 내 팔 밖에 보이지 않았다. 등 뒤로 닛코의 그림자가 깔렸다. 뒷통수 쪽에 손가락이 닿더니 거즈를 떼어냈다. 손이 천천히 거즈를 뜯어내며 내려갔다. 목을 타고 등을 지나 허리까지 내려가기 직전에 떨어졌다. 생각보다 큰 흉터구나. 닛코가 물에 적신 수건을 조심스럽게 몸에 댔다. 흉터 주변으로 갈 수록 손길이 섬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는데는 조금 걸리겠군.” 불편해도 참아라. 상처 주변을 물로 닦고, 다시 한 번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는 흉터 위에 새로운 거즈를 붙였다. 떨어지지 않게 꾸욱 누르는 통에 약간 아팠다. 나머지는 스스로 닦으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나름 열심히 수건에 물을 적셔서 닦다가 물이 담긴 그릇을 엎질렀다. 수건으로 닦으려고 하니까 닛코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마른 걸레로 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목욕이 끝났으면 입으라면서 유카타를 가져다줬다. 닛코가 수습하는 동안 혼자 유카타를 입었는데, 매듭이 엉성하게 묶이다 못해 풀어졌다. 그것을 본 닛코가 능숙하게 묶어줬다. 침대에 깔아뒀던 수건도 챙긴 닛코가 일찍 자라 말하곤 방을 나갔다. 전등도 꺼져서 침대에 누웠다. 집이 아니라 여행 같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
낮에는 집안을 돌아다녔다. 들어가지 말라는 방은 대부분 남의 방이었다. 하루는 복도를 걷는데 방문 하나가 드르륵 열렸다. 금발의 기모노, 노리무네였다. 좋은 걸 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해서 방에 들어가면 화과자를 줬다. 어린애는 오랜만이라 뭘 줘야 좋아할지 모르겠구나. 그러고 호탕하게 웃곤 했다. 말하지 않으면 더더욱 모른다, 꼬맹아? 이 집에서 가장 자주 놀아주는 상대였다. 밖에 있는 경비견들은 노리무네가 다가가면 납작 엎드렸다. 저녁에는 종종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났다. 헬멧을 벗은 히메츠루가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면 인사를 건넸다. 몇 번 손을 흔들어주면 흐음, 하고 지나갔다. 어떤 날은 작은 조각케이크 따위를 가져다줬다. 닛코 군한테 걸리면 둘 다 귀찮아지는 거야. 잘 처리해. 그래서 꼭 방에 가져가서 먹고 쓰레기는 고이 접어 방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산쵸모는 나를 데려왔지만 집에서 자주 보이진 않았다. 아침에 드물게 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것보다 더 드물게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면 웃으며 잘 지내고 있냐 물어왔다… 가장 가깝게 굴지만 가장 멀게 느껴졌다. 난센은 가장 자주 보였지만 대화는 자주 하지 않았다. 산쵸모를 따라다니거나 닛코를 찾아 다니거나, 히메츠루의 수발을 들거나, 노리무네의 심부름을 하거나… 내가 보기엔 가장 바빠보이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와 눈이 맞으면 눈살을 찌푸렸다.
닛코는 자주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었다. 나의 방 바로 옆이 닛코의 방이었다. 집안 어딘가를 가도 한 번씩 나를 확인하는 게 느껴졌다.
매주 목요일에는 얌전히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아야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조절’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목요일이 아니여도 맞았다. 맞는 동안에는 나갈 수도 없어서 침대에 누워서 책이나 겨우 읽었다. 책은 매주 닛코가 적당히 골라왔다. 말은 알아듣는 것 같은데 글자를 못 읽지는 않지? 처음에는 그림책부터 역사책까지 다양하게 쌓여있던 책이 다음에는 종류가 줄어들었다. 그 다음에는 더더욱. 권수가 줄어든 게 아니라 범위가 좁혀졌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내가 재밌게 읽은 책과 비슷한 책들이 쌓였다. 어떻게 안 거지? 티도 나지 않게 책을 도로 정리해놨는데. 보지도 않고서.
책에서 ‘감시’라는 단어를 보고 실험해보기로 했다.
처음 연관을 짓게 된 건 실수로 책을 떨어뜨린 날, 읽던 도중이라 마저 읽기 위해 책을 주우려고 했다. 당연히 침대 밑으로 떨어진 책을 링거를 꽂은 내가 주울 수 있을리 없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더니 닛코가 들어와 책을 주워줬다. 링거를 다 맞기 전에 닛코가 방에 들어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다다미 위로 떨어진 책은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번 책을 떨어뜨려보았다. 떨어뜨리고 잠시 기다리면 문이 열렸다. 나중에는 닛코가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꾹 꾹 눌렀다. 손에 힘이 없나? 마침 끝날 시간이라 링거 정리를 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닛코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가장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를 보고 있어? 닛코는 나를 보지 않아도 아는 사람 같았다. 닛코는 문제가 생기면 비로소 나를 보았다.
평소에는 문제가 생기면 달려올 사람이 많았다. 높은 곳에 걸려있는 그림이 궁금하면 노리무네가 꺼내주기도 하고, 몰래 들여온 케이크를 바닥에 떨어뜨리면 히메츠루가 치워주기도 하고, 경비견이 달려들면 난센이 밀어내주기도 하고, 옷이 해어지면 산쵸모가 새 옷이 필요하냐 묻기도 했다. 이름 모르는 사람들 마저도 지나가던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줬다. 물론 닛코 또한 해주는 부분이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닛코만 해줄 수 있는 걸 바라니까.
억지로 팔에 붙은 링거 주사를 떼어냈다. 주변엔 피가 튀었고, 아팠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참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고요한 방에 아직 남은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그리고 쿵쿵거리는 발소리. 문이 열렸다.
닛코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난처해보였고, 당황해보였다. “이게 뭐하는 것이지?” 웃지 않고, 상냥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오묘하게 색이 번진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피가 흐르는 내 팔을 잡고 지혈하는 손길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하얀 이불이며 하얀 자켓에 붉은 핏방울이 흔적을 남겼다. 팔을 쥔 손으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일부러 한 것인가?”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동정이나 의문조차 담기지 않았다.
“닛코.”
조금은 놀랄 줄 알았는데 작은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점이 닛코다웠다.
“드디어 나를 보는군.”
닛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매주 목요일, 내가 가만히 앉아서 링거를 맞는 말, 내 방에 나와 닛코만 들어오는 날.
링거 주사를 뽑으면,
링거액이 세 방울 떨어지면,
그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