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은 남극에 있습니다. 추위를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감정으로 승화하지는 못합니다. 펭귄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그것도 감정으로 승화하지는 못합니다. N의 옆에 스태프가 말합니다.
“구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분명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자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다행히 의무도 없습니다. N은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규칙 따위가 있거든요. 구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구하면 안된다.
동료들의 매정하다는 눈길을 뒤로하고 얼어 죽는 펭귄의 사체를 밟고서(물론 관념적인 이야기입니다) N은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기계적인 인간에게도 밥은 필요하죠. 대한민국에서 생산했다는 컵라면을 꺼내 들고 물을 끓입니다. 물은 끓고 있고 N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멍때리기도 아닙니다. 그냥 안 하는 겁니다. 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N은 아무개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무개가 신나게 떠드는 동안 N은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않습니다. 죽어가던 펭귄 무리 따위가 갑자기 어른거립니다. 이런 감성적인 사람, 아닌데 신기하죠(웃음). 어쩌면 그저 찍기만 하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감독에서 뭔가를 드디어 얻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은 바로 죽음. 어쩌면 N은 거기에 관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N은 관여하지 않았네요. N은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관여하고 싶다. 관여하고 싶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 N은 말합니다.
“죽음으로 넘치는 곳에 가보고 싶어.”
아무개는 답합니다.
“적당한 곳을 알지.”
그렇게 N은 중동의 한 지역에 가게 됐습니다. 마치 동화처럼, 용을 물리치러 모험을 떠나는 용사처럼 N은 출발했습니다. 비행기에서는 기내식을 먹으며, N은 반복되는 생활을 하며, 새로운 시작을 발끝으로 기대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발끝에서라도, 어쩌면 발톱에 있을지 모르는 아주 얇은 신경줄 하나가, 긴장을 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N은 중동에 도착했습니다. 모래가 햇빛에 타가는 냄새가 납니다. 하늘은 푸르고 땅의 색은 누렇습니다. N은 콧속에 들어오는 미세한 모래들을 감지합니다. 기침을 해보지만 익숙해지는 게 낫습니다. N은 깨닫고 머플러를 입가에 갖다 대 봅니다. 이곳에 내전 따위가 일어나고 있다니 N은 잘 실감 나지 않습니다. 이번에 주변에 둘러싸인 동료들은 모두 눈에 무언갈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눈빛에 단순 태양과 반사된 휜 점 따위가 아니라, 이글거리는 무언갈 지니고 있습니다. N은 그게 뭔지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지 N은 발끝의 미동을 심장으로 옮기고 싶을 뿐입니다.
그들은 피난촌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찍고, 기록합니다. 그들의 피부에 들러붙은 흙 자국을 눈을 끔벅거리며 시야에 담아내는 것으로 느낍니다. 차갑습니다. 뜨거운 나라인데, 이토록 차갑습니다. N도 그걸 느꼈는지 모릅니다. 다만 신기루에 먼 것 같은 눈을 지닌 동료와 달리 피난촌의 사람들은 또 다른 걸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공에는, 그 세심하게 요동치는 흑점은 공포를 전제로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째선지 동료의 발광보다 여기서 N은 생을 강하게 느낍니다.
N과 동료들은 묵을 곳에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때 B는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모든 것을 눈에 들여놓기 위해서 입니다. B는 N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B의 동료들은 그들에게 뱉은 침으로 그들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지만 B는 침 한번 뱉지 않았습니다. B는 N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B는 말했습니다.
“저 남자는 불쌍하다.”
그리고 납치가 시작됐습니다. 몸을 숨기고 있던 B의 일당들은 불쑥 나타난 채 N과 동료들을 덮치고 그들을 총으로 겁 준 뒤 손발을 묶었습니다. N은 이 모든 과정에서 순순히 따라주고 있었지만 발끝에서 발톱에 달린 아주 얇은 신경 하나가 심장까지 무언갈 전달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을 가리는 천을 마주할 때 보였던 대장 같은 사람, B의 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남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N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기다. 저거다. 저거 말고는 없다.
트럭에 실린 N의 동료들은 공포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떤 자는 어리석게 자신의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으나 B의 일당들에게 그것은 코웃음에 불과했습니다. 우는 이도 있었고 발작에 이를 정도로 괴로워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N은 떨리는 마음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긴장 따위가 아닙니다. 기대였습니다. 어딘가 B의 기운 같은 게 있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믿음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N은 B의 이름을 몰라 무어라 되뇔지 몰랐습니다만, 계속 되뇌었습니다. 모르는 이름을, 계속.
B의 거처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눈을 가리는 천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N과 동료들에게 엄격하면서도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상황 같은 게 정리되자 N과 동료들 앞으로 B가 나타났습니다. 그에겐 후광 따위 없었습니다. 다만 모호하고 어딘가 세상을 흡입하듯 깊은 눈동자에 N은 떨림을 느꼈을 뿐입니다. N은 드디어 긴장했습니다. 마주한 것에, 우리는 믿는 것에 마주할 때 공포를 함께 느낀다고 합니다. 아마도 심판받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B는 그런 취미 따위 없습니다. B는 그저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독재정권의 반군인데, 코뮌을 세운 후 잘 지냈으나 미군 주둔으로 인해 다시 내전 상태가 되었다, 곧 미군과 우리는 상대하게 될 테니 그때 우리의 처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해달라.
시시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만 왠지 거기서 N은, 그것을 말하는 B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말투에서, 강한 생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운명과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N에 그런 낭만적인 재주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B의 거처지에서 하룻밤 지나고 해가 떴습니다. 중동의 해는 오늘도 모든 걸 불태워버릴 것 같습니다. 정의도, 선한 마음도, 불의도, 악한 마음도 전부 미워서 태워버리는 것 같습니다. N은 일어나 B에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진행됩니다. 거처지로 미군 무리가 B의 일당을 습격합니다. 납치된 N을 확인했다며 N을 데리고 갑니다. N은 딱히 반항하지 않았으나 난생처음 자기가 계속 지니고 있었던 허무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N은 눈앞에서 B가 총알에 박히는 걸 봅니다. 정확히 그의 손에, 발에, 그리고 가시관처럼 머리에 두발. 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옆구리에 스치고 말았지만 뼈에 닿아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B는 그러는 와중에도 눈에 담긴 것을 잃지 않았습니다. 순간 N은 외치고 말았습니다. 어제 안 B의 이름을요.
“부키츠마루, 부키츠마루!”
모든게 끝났습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적어도 N은). N과 동료들은 B의 일당의 설명대로 미군에게 상황을 이야기해줬습니다. 하지만 뭐, 당연히 통하지 않았죠. N은 아무 말 않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미군에 속한 의사는 일시적인 PTSD라고 했습니다. 일시적인? N은 인생 전체에 대한 PTSD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눈을 다시 만나본다면. 세상을 흡입하는 깊은 구멍에 나도 빠지고야 만다면.
B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N은 생각했습니다. 끝인가. 그리고 N은 일어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복구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세포도 전부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한번 감고 뜨니 참으로 마음도 가벼워지고 모든 게 떠나간 것 같았습니다. N은 휴직서도 내지 않고 다시 일을 하러 갔습니다.
“다시 가야지요, 남극에.”
남극은 거기에서 살고자 한 생명조차 자비롭지 못합니다. 그때 죽어버린 펭귄을 생각합니다. B의 죽음과 같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아니, N은 B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N은 다만 또 죽어가는 펭귄을 찍고, 보고… 그냥 모든 것을 흘러가게 냅두는 겁니다. 그리고 스태프의 말 한마디를 듣는 거죠.
“구해야 된다.”
“…?”
카메라에 붙박던 두 눈동자를 고개와 함께 옆으로 돌립니다. B가 있습니다. 미소를 지은 B가 있습니다. B는 N의 손을 잡고 자신의 옷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갈비뼈를 만지게 합니다. 상처는 피가 나지 않을 뿐, 여전합니다.
“나를 믿는가.”
N은 대답하지 않고, 만지는 것도 그만둡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 B에게 말합니다.
“구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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